1. 인류의 진보인가, 파멸인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펜하이머>는 제2차 세계대전의 중심에서 핵무기를 개발한 인물, J.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삶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그는 이론물리학자로서 맨해튼 프로젝트를 주도하며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무기를 만들어낸 인물입니다. 그러나 영화는 단순히 과학적 업적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핵개발이 개인과 사회, 인류 전체에 끼친 영향과 그 윤리적 대가를 깊이 있게 파고듭니다.
이 작품은 세 가지 시간축을 병렬적으로 교차 편집하며 서사를 이끌어갑니다. 첫째는 오펜하이머의 젊은 시절부터 과학자로서 성장해가는 과정, 둘째는 로스앨러모스에서의 핵개발 현장, 셋째는 이후 정치적 탄압과 내부 청문회 과정입니다. 이 다층적 구성은 인물의 내면을 입체적으로 조명하며, 단순한 영웅 또는 희생자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 인간의 복합적인 본질을 탐구하게 만듭니다.
2. 과학자의 고뇌와 양심의 무게
오펜하이머는 핵개발의 주역이자, 동시에 그 위험성과 윤리적 문제를 가장 먼저 자각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영화에서 그는 ‘트리니티 실험’의 성공 직후, 힌두교 경전에서 따온 “나는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라는 내레이션을 읊조리며 깊은 죄책감에 사로잡힙니다. 그는 자신의 연구가 수백만 인명을 죽이는 데 사용되리라는 사실에 끊임없이 고뇌하며, 이후 군의 계속된 무기 개발 제안에도 반대 입장을 보입니다.
냉전 초기, 미국 정부는 소련과의 핵무기 경쟁에 본격적으로 돌입하며 수소폭탄 개발을 추진합니다. 하지만 오펜하이머는 그에 반대하고 핵 확산에 제동을 걸고자 하면서, 정치적 반발과 탄압을 받게 됩니다. 이로 인해 그는 결국 안보 심사에서 탈락하고, 핵심 과학자로서의 위상 또한 추락하게 됩니다. 이는 과학이 언제나 진리와 진보만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인간의 권력 구조 속에서 과학이 어떻게 왜곡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극적인 사례입니다.
3. 놀란 감독의 연출과 배우들의 몰입
크리스토퍼 놀란은 이 영화를 통해 처음으로 실화 기반 전기를 다루었지만, 그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시간의 흐름, 주관적 시점, 내면의 불안 등을 활용하여 오펜하이머의 심리를 시청자에게 생생히 전달합니다. 특히 아이맥스 65mm 흑백 필름을 도입해 컬러와 흑백의 장면을 병렬적으로 구성함으로써, 현재와 회상의 구분을 시각적으로도 명확히 보여주었습니다.
킬리언 머피는 오펜하이머 역을 맡아 지금껏 보여주지 않은 내면 연기의 극치를 선보입니다. 그의 말없는 눈빛, 깊은 주름, 죄책감에 흔들리는 목소리는 이 인물의 내면적 고통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며 관객에게 깊은 몰입을 선사합니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연기한 루이스 스트라우스는 정치적 계략가로, 과학자 오펜하이머와 대비되는 현실적 권력의 화신입니다. 그는 이번 작품을 통해 슈퍼히어로 이미지를 벗고 강한 인상을 남깁니다.
4. 총평 – 진보와 윤리 사이에서 던지는 질문
<오펜하이머>는 과학이 인류에게 어떤 이익을 줄 수 있는지를 넘어, 과학이 불러올 재앙을 직시하게 만드는 작품입니다. 이 영화는 단지 한 과학자의 전기를 넘어서, 과학과 도덕, 국가와 개인, 권력과 신념이라는 거대한 화두를 던지는 철학적 드라마입니다. 핵무기를 둘러싼 논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놀란 감독은 이를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닌 현재진행형의 문제로 끌어올렸습니다.
오펜하이머의 인생은 ‘위대한 업적’과 ‘영원한 속죄’라는 두 축으로 요약됩니다. 그는 세상을 바꿨지만, 그로 인해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오펜하이머>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위해 지식을 쌓는가?" 이 작품은 지적이고도 도덕적인 질문으로 가득 찬 명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