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름을 잃고 자아를 찾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세계에서 한 소녀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을 그린 스튜디오 지브리의 대표작입니다. 주인공 치히로는 부모님과 함께 이사를 가던 중, 우연히 들른 폐허 속의 터널을 지나 신들의 세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곳에서 부모는 욕심을 부리다 돼지로 변하고, 치히로는 이름을 빼앗기고 ‘센’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됩니다.
작품의 가장 핵심적인 상징은 ‘이름’입니다. 유바바라는 마녀는 치히로의 이름을 뺏어가고, 이름을 잃은 자는 자기 자신을 잊게 됩니다. 치히로가 자신의 본명을 기억하고 되찾는 과정은 곧 정체성과 자아를 회복하는 여정입니다. 이 설정은 단순한 판타지가 아니라, 현대사회 속에서 타인의 기준에 의해 정체성이 흔들리는 모든 이들에게 던지는 은유이자 메시지입니다.
2. 상징과 존재의 풍요로운 세계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이 작품에서 사회적 풍자와 철학적 주제를 은유적으로 녹여냅니다. 예를 들어 ‘가오나시’는 물질과 관심에 굶주린 존재로, 현대 소비사회의 인간 군상을 상징합니다. 그는 처음엔 조용하고 미약한 존재였지만, 온천장 안에서 돈을 뿌리고 음식을 탐닉하며 점점 괴물처럼 변해갑니다. 이 모습은 인정받고 싶어하는 외로운 마음이 왜곡될 때 얼마나 위험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또한 하쿠라는 존재는 치히로와 깊은 인연으로 얽혀 있으며, 이름을 잊은 채 유바바의 종으로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는 사실 치히로가 어릴 적 빠졌던 강의 정령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며, 둘의 재회는 단순한 로맨스가 아닌 '자연과 인간의 기억'에 대한 회복을 뜻합니다. 이처럼 작품은 자연과 인간, 과거와 현재, 자아와 타자 사이의 균형을 섬세하게 그려냅니다.
3. 여성 성장 서사의 새로운 기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여성이 주인공인 성장 서사로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치히로는 처음엔 울고 짜증내는 평범한 아이에 불과했지만, 신들의 세계에서 자신보다 강하고 낯선 존재들과 마주하며 점차 용기와 책임감을 키워갑니다. 그녀는 문제 상황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며, 타인을 돕고 희생할 줄 아는 인물로 변모합니다.
특히 치히로가 하수구의 오물신을 치우는 장면이나, 부모를 돼지 무리 속에서 구분해내는 장면 등은 단순한 해결 능력을 넘어 도덕적 판단력과 공감 능력을 상징합니다. 이는 오늘날 많은 애니메이션에서 여성 주인공이 단순히 외적인 능력보다 내면의 성장과 판단을 통해 주체성을 회복하는 데 영향을 주었습니다.
4. 총평 – 정체성, 환경, 기억이 어우러진 판타지
이 작품은 단지 어린이를 위한 판타지가 아니라, 다양한 상징과 메시지를 통해 모든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깊이를 지닌 작품입니다. 성장의 과정에서 누구나 겪는 상실과 회복, 사회적 틀에 갇혀 잊혀지는 자아에 대한 회복, 그리고 자연과 공존의 가치를 담아내며 애니메이션의 예술적 위상을 새롭게 정립했습니다.
아카데미 장편 애니메이션상 수상작이라는 점은 단지 수상 경력을 넘어서, 이 작품이 가진 철학적 무게와 예술적 완성도를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결과입니다. 관객은 치히로의 여정을 통해 마치 스스로가 낯선 세계에 떨어졌다가 다시 자신의 이름을 되찾고 돌아오는 듯한 감정적 경험을 하게 됩니다.